2016.01 [인용] 오체투지 히말라야 트래킹
히말라야 트래킹 189
나는 늘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무엇인가에 도전하고 있을 때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던 히말라야 트레킹은 역설적으로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도전이었다.
정상인들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히말라야 트레킹, 하지만 나는 도전했고 그리고 성공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방송국에서도 성공을 반신반의했고, 특히 실제 트레킹이 시작된 뒤에는 스태프들이 한결 같이 걱정하였지만, 나는 결국 히말라야 트레킹에 성공했다.
2000년 12월, 나는 여전히 학점을 따기 위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으며 지내는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MBC 방송국에서 느닷없이 히말라야 등정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 왔다. 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는 김소영이라는 언니가 함께 있었다.
소영언니는 97년 하이텔에 있는 장애인 동호회였던 '두리하나'에서 처음 만났다.
하얀 얼굴에 목소리가 예쁜 언니는 중학교 3학년 때 눈이 나빠져 병원에 찾아갔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언니에게 내려진 병명은 망막색소결핍증이었다. 그것은 점점 시력이 떨어져 가는 것으로 결국에는 시력을 잃게 되는 병이다. 이제 30센티미터 정도밖에 보이지 않아 시각장애인 1급 판정을 받은 언니와 나는 장애인 동호회였던 '두리하나'에서 유난히 대화가 잘 통해 금방 친해졌다.
날 때부터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얻은 장애가 더 힘들 수 있는데 언니는 죽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잘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연극을 하는 언니가 참여한 작품이면 난 꼭 보러 갔고, 언니는 내 작품이 전시되는 전시회는 빠트리지 않고 찾아 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가는 사이였다.
언니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고 결국 MBC 방송국에서 신년특집 프로그램으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소영언니의 평소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선뜻 승낙을 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함께 나설 동반자로서 적임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소영언니와 나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게 되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소영언니의 가이드 역할과 함께 나는 더욱 책임감이 무거웠지만, 뜻밖의 여행에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즐겁게 이 여행에 나서기로 했다. 오히려 편안히 관광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내 몸과 정신의 한계를 실험하는 도전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 더욱 기대되었다.
하지만 결코 즐거운 여행만은 아니었다. 힘들 것이라 상상은 했지만 그 상상이 얼마나 어긋난 가벼움이었는지 곧 깨닫게 되었다.
2000년 12월 14일, 소영언니와 나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네팔을 향해 떠났다. 홍콩에 내려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구름 위를 날아서 카트만두에 도착한 시각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11시50분이었다. 우리나라를 떠나 하루가 넘게 날아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소영언니의 시력이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또 더 나빠진 것을 느낄 수 있어 안타까움과 책임감이 더 깊어졌다.
카트만두 공항은 시골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지만 뭐라 표현 할 수 없는 특유의 향을 뿜고 있었다. 바닥엔 흐린 적색과 흰색이 혼합된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나무로 지은 면세점이 특이했으며 비자 만드는 곳까지 있고 생각보단 꽤 붐비고 컸다.
그런데 공항으로 나오니 웬 도깨비 시장이 여기 있나 싶었다. 애들이 1달러짜리 홍콩화폐를 보이며 달라고 쫓아다니지를 않나, 없으면 코인이라도 달라고 쫓아다니지를 않나, 정신이 없었지만 서글프고 불쌍한 생각이 교차되면서 한 순간 그들이 다시 태어날 때 다른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절로 주머니로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들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했지만 '스윗, 마담.' 하면서 애절하게 달라붙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러에 사탕을 싸서 한 움큼을 쥐어주고는 줄달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네팔에서 본 첫 풍경은 바로 '파슈파티나스 화장터'였다.
목적을 위해 투쟁하고 맞서는 우리의 열정이나 도전과도 같은 격동의 우리 민족과 비교되는 저 화장터의 분위기가 묘한 상징적 풍경으로 연상된 것이 나만의 억지였을까.
15일, 아침을 먹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기 위해 경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로 출발하였다. 안개가 심해 경비행기 출발시간이 지연되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조바심을 내지 않고 느긋했다. 버스 출발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대번에 난리를 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났다.
루크라 행 경비행기에 탑승한 사람들은 우리 일행을 빼고는 모두 스님들이었다. 탑승인원을 17명이었는데 신기한 것은 기차처럼 사람을 내리고 태우는 역이 있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 역은 라미디아 역이었는데 아까 탔던 스님들이 다 내리고 다른 사람들이 탔다. 듣기로는 착륙할 때 바이킹 타는 것 같이 급강하한다고 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아찔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시시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는 느낌은 마치 포장이 안 된 길을 달리는 버스를 탄 것처럼 온몸에 진동이 느껴졌다.
드디어 목적지인 루크라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였다.
네팔에 왔으니 네팔 음식을 먹어 보려고 했는데 유럽인들이 많아서인지 스파게티며, 별게 다 있었다. 육류로는 염소, 물소, 치킨이 있다고 해서 나는 만만한 치킨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드디어 산행이 시작되었다. 히말라야 입구에 해당하는 루크라는 2842m로 내리막이었지만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소영언니는 오로지 나와 가이드만 믿고 갈 뿐이어서 더 마음이 긴장되어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히말라야산맥 가운데 칼라파타르산인데 네팔어로 '검은 돌' 이라는 뾰족한 산이었다.
우리는 루크라를 출발하여 불경을 외며 건넌다는 다리가 있는 팍팅(2600미터)을 향했다.
5시간 정도 걸었을까 다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땀이 나서 모자가 다 젖어왔다. 날씨가 무척 덥기 때문인데, 땀을 그리 흘리니 당연히 몸이 쉽게 지쳤다. 출발 때부터 이번 트레킹이 만만치 않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슨 암벽이나 등반이 아니고 트레킹이니 걷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길도 평지가 아닐 뿐 아니라 돌길로 이어진 것이 심상치 않았다.
"바지 속이 땀에 절었는지 물처럼 흘러내려."
소영언니가 울 듯한 표정으로 하소연을 했다. 언니는 이럴 줄 몰랐다며 벌써 힘들어했다. 그럴 것이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낯선 길을, 그것도 편편한 아스팔트도 아닌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아무리 내가 앞에서 이끌어준다 해도 말이다.
어떻게든 언니에게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 크게 심호흡을 했다.
5시간 정도의 산행이었지만 첫날부터 산은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오르락내리락 걸어가면서 마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것처럼 산은 꼭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뿐이 아닐것이다. 자연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겸손을 배우게 되고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래서 자연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인자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것일까.
다음날은 더욱 힘이 들었다.
소영언니는 체력이 달려서인지 시간이 다르게 지쳐갔다. 팍딩에서 점심을 먹고 2킬로쯤 더 올랐을까? 언니는 너무 힘들어하면서 주저앉더니 결국 눈물을 보였다. 나 역시 어제와는 달리 엄청 지쳤지만 눈물을 흘리는 언니를 보니 내 고통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는 어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았다.
"언니, 울지 마. 언니가 갈 수 있으면 가고. 아님 쉬자. 언니가 결정해."
그 말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목이 매캐해졌다. 마치 최루탄이라도 마신 듯이.
한숨을 쉬던 언니는 고개를 들고는 "가야지, 갈래."하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햇빛에 눈물이 반짝이는데 희미한 미소가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하얀 얼굴의 언니는 보기에도 평소 운동을 가까이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였다. 거기에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악조건이니 옆에서 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자, 그럼, 다시 출발하자. 언니 힘내!"
그런데 그때부터 길은 계속 오르막길이었다. 숨이 차고 다리가 무겁고 뻣뻣해졌다. 아무 데나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일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언니는 너무 힘들어했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중간부터 가이드와 포터가 언니를 번갈아가며 없었다.
"미안해요. 내려가는 건 어찌 해보겠는데 올라가는 건 너무 힘들어요."
미안해하며 업혀가는 언니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강산에의 '넌 할 수 있어'라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언니에게도 나에게도 꼭 필요한 노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머리가 서서히 조여 오더니 점점 더 그 통증이 심해졌다. 더 심해지면 곤란할 거 같아 가이드한테 얘기했더니 바로 고산증세라고 했다.
"모자를 쓰세요. 머리가 추우면 고산증세가 빨리 찾아와요."
가이드인 다와씨가 우리말을 곧잘 해서 참 다행이었다. 거기에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 편안한 기분으로 함께 산행을 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조언대로 모자를 쓰고 걸었더니 조금은 덜 한 것 같았다.
길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윤회하듯이 그렇게 등반길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그 끝없는 길이 남체로 이어졌고 우리는 남체의 정해진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언니는 나무토막처럼 침대 위로 쓰러졌다. 저녁도 먹지 못해서 나중에 가이드가 죽을 끓여왔지만 몇 숟갈 먹지도 않고 다시 누웠다. 언니는 정말 힘든 모습으로 그렇게 시체처럼 잠을 잤다.
그날따라 힘들어서인지 우리 음식이 못 견디게 먹고 싶어 가져온 라면과 햇반을 가지고 식당에 내려갔다. 가이드가 라면을 보더니 반가운 기색을 하며 자기가 끓여준다고 했다. 라면을 끓여봤을까, 빙그레 웃으며 건네주었는데 잠시 후 먹게 된 라면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알고 보니 다와씨는 전직이 요리사였다고 했다.
"나 된장찌개도 잘 끓여요."
"아, 된장찌개. 말하지 말아요. 너무 먹고 싶어요."
후루룩 후루룩, 후후 불어가며 라면을 맛있게 먹는 동안 낮 동안의 힘든 시간들이 어느새 저만치 달아났지만 기운도 함께 바져나가는 긋 했다.
언니도 함께 맛있게 먹읐으면, 하는 마음에 아쉬웠지만 빨리 회복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백팔 배를 하고 나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정이므로 체력관리를 좀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땀을 많이 흘려 물을 많이 마셔서일까.
자다가 화장실을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언니와 함께.
화장실 가려고 방문을 나서는 순간, 아, 남체의 밤은 그리도 아름다웠다. 그날 그곳에서 본 그 밤은 평생 잊지 못할 눈부시도록 신비로움으로 깃들어 있었다. 짙푸른 하늘빛이며 거기에 박혀있는 별들, 어슴푸레 보이는 설산들. 마치 태초의 순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유난히 밝고 빛나는 별빛, 금방이라도 그것들이 쏟아져 내려 온천지가 반짝일 것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그 맑고 깨끗한 공기로 나를 채우려는 듯, 그리하여 내 영혼의 먼지까지 정화시키려는 듯. 천천히 내 몸 전체가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모두들 잠들어 적막한 시간에 이 찬란한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언니가 화장실 갔다 와서는 몸이 으슬으슬 아프다고 했다. 병이 들려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언니, 어서 푹 자. 그리고 내일 아침은 꼭 많이 먹어. 안 그러면 몸이 더 지칠 거야."
언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풀려서 고산병도 없이 언니도 나도 정상에서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다음날은 산행을 하지 않고 그냥 남체에서 하루 쉬었다. 신체 적응 기간이다.
한국을 떠나오면서 다시 가지기 힘든 귀한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스케치할 간단한 도구를 준비를 해왔는데, 그건 실정을 모를 때의 욕심이었다. 스케치를 할 시간이나 여력이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전날엔 겨우 스케치를 했는데 펜 선택을 잘못해서 실패하고 말았고 다시 그릴 시간은 없었다.
산행이 없는 날이라 스케치를 많이 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결국 두 장밖에 못했다. 이것저것 구경할 것도 할일도 많았다.
가이드의 안내로 벼룩시장 같은 곳에 가보았는데 초라하지만 바지, 옷, 신발 종류를 바닥에 진열해놓고 팔고 있었다. 그런데 먼지가 많이 묻어서 그렇게 보였을까? 마치 입다가 내다 논 옷 같아 보였다.
시장 안에 천막이 있었는데 그 속에 4명의 애들이 있었다. 티벳에서 10일 걸려 국경을 넘어 왔다고 했다. 사탕을 한 움큼씩 쥐어주니까 답례라며 미숫가루 같은 걸 타 주는데 그릇이 흙먼지 가득인데다가 새까만 손으로 미숫가루를 퍼서 타주는 거였다. 그러나 그 정성을 생각해서 기쁜 얼굴로 맛있게 받아 마셨다. 깨끗한 것도 깨끗하지 않은 것도 결국 변하는 것이며 마음의 차이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있는 물을 먹은 것도 다 마음의 차이지 않은가.
여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의 관념을 초월한 사람들로 보였다.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진정 나를 옭아매고 있는 많은 구속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저녁에는 3일 만에 샤워를 했는데 거의 기절할 뻔 하였다. 옷을 다 벗고 물을 틀었는데 찬 정도가 아니라 얼음물이 쏟아지는 것이다.
주인아주머니 말로는 조금 지나면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했는데 결국 미지근한 물밖에 안나왔다. 집에서 샤워할 때가 간절히 그리웠다. 다시 한번 우리가 얼마나 몸에 지배당하고 사는지, 우리 몸이 우리를 얼마나 가두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4일째, 상보체(3750미터)에 도착했을 땐 심한 바람이 또 우리를 막았다. 자연의 힘에 도전하려는, 자신의 영역에 근접하려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을까.
그냥 올라가기도 힘든데 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걷자니 정말 힘들었다. 편안해지고자하는 몸의 욕구가 점점 강렬해졌다.
숨이 차오르고 고산증세도 심해졌다.
우리는 잠시 쉬기로 하고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 들려 커피를 마시며 산 정상을 응시했다. 우리의 목적인 삼각형 꼭대기 부분만 약간 보였다. 보기에는 가까운 거리인데 아직도 먼 길이다. 그래도 눈앞에 고지가 보이니 힘이 났다.
다시 산을 오르면서 '산'은 '나'고, '나'는 '산'이다. 라는 생각을 자꾸 했다.
무조건 빨리 가려고 할수록 숨이 차오르고 고산 증세가 나타날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천천히 한발자국 내딛는 것이 결국 내가 산에 오를 수 있는 길일 것이다. 거북이와 토끼가 달리기 경주를 할 때 거북이가 이기는 이치랑 똑같다.
손발이 저리고 몸이 무거운 건 차치하고 숨이 차서 몹시 힘들었다. 내가 이정도이니 소영언니는 어땠을까. 언니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할 때마다 포터가 업고 갔는데, 참 놀라웠다. 사람을 업고 지치지도 않는지 또 얼마나 빠르던지 내가 포터를 따라 가다가 지칠 뻔했다.
몸을 혹사하고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은 만 배 백일기도로도 충분했고 또 매일같이 천 배를 해오면서 단련된 몸인데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또 왜 스스로 이리 힘든 도전을 했는가, 싶으면서 솔직히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한 순간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유혹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더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때맞춰 언니와 내게 영양제가 투입되었다. 각자 엄마와의 전화 통화가 바로 그것이다. 점심 때 엄마랑 통화를 한 것이다.
"여보세요."
엄마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온 몸이 뜨거워졌다.
"엄마? 엄마!"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좋고, 지금까지 힘들었던 게 복받쳐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역시 우리 엄마다웠다.
"스케치 많이 하고 있어요?" 라는 게 첫 인사였다. 몸은 어떠냐고, 아픈 데는 없느냐는 게 아니었다.
"엄마, 스케치 못했어요. 시간이 없어서,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못해요."
엄마와 나의 거리를 인식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못하면 어떡해요? 해야지!"
"내가 가서 다 얘기해 줄게요. 엄마."
"힘들어도 몸 아끼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엄마는 끝까지 몸조심하라는 말보다 나의 할 일을 지적해 주셨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항상 체크하라고 말하는 우리 엄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에너지가 충만되는 것 또한 느껴졌다.
사실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하는 말을 하셨다면 그렇잖아도 힘들어서 핑계를 찾고 있던 내가 무너졌을 지도 모른다. 고통 앞에서 흐려지는 정신을 엄마는 역시 두드려 주셨다.
엄마란 존재는 그런가 보다. 함께 하든 함께 하지 못하든 늘 자식에게 힘이 되어주는, 그러면서도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애틋해지고 그리움이 출렁이는 존재. 이 세상에 엄마와 자식이라는 관계만은 숭고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질서와 같다. 신비하고도 강력한 힘으로 서로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엄마들의 목소리로 기운을 차린 우리는 서로 열심히 해보자고 위로를 하면서 다시 길을 나섰다.
'그래, 해보는 거다. 고산증이든 바람이든, 가파른 자갈길이든 우리를 막아보려면 막아봐라, 우린 성공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극복해서 정상에 우뚝 서고 말 것이다.'
19일, 탱보체까지 올랐다.
"히말라야가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오고 싶다는 말 하지 않았어."
지칠 대로 지친 소영언니는 그렇게 말하고 힘겹게 웃었다.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럴까, 싶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 역시 몹시 힘들었다. 밤마다 누우면 온몸이 아팠다. 끝이 없는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머리는 아프고 속도 메슥거려 당장이라도 엎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언니를 잘 이글어줘야 한다는 긴장감까지 동반하고 있어서인지 어깨까지 아팠다.
하지만 난 이번 트레킹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도 오고 싶어진다. 앞으로의 일정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묘한 매력을 느낀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나는 또 히말라야로 올 것이다.
내가 이곳에 느끼는 묘한 매력 중 하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산과 그리고 모든 주변의 편안함과 행복감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그래서 오히려 더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에 오기 전에는 하루 종일 전화와 인터넷 등 문명의 혜택을 마음껏 누렸을 분 아니라, 그것들이 없이는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며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었는데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지내면서도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몇 달 정도 이 곳에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 무렵, 언니는 완전히 탈진 상태로 누워 있었다. 몸이 아프니 집 생각이 더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타까웠다.
소영언니가 아픈 것은 일단 육체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많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평소에 너무 운동을 하지 않은 탓인 것 같았다. 거기에다 그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며 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입맛이 아니라 필요하니까 먹어야 한다. 나도 맛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었다. 걷기 위해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먹는 것일 뿐이었다.
죽 몇 스픈 드다 마는 언니를 억지로 먹여보기도 하고 애원조로 달래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열이 나는 것 같아 아스피린을 먹인 후 침낭을 갈고 담요를 덮어 주었는데, 걱정이었다. 언니가 아픈 것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좀 더 오기를 부려 주었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다.
6일째 되던 날, 우리는 드디어 페르체까지 왔다. 탱보체에서 팡보체를 거쳐 페르체까지 온 것이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곳이다. 팡보체 롯지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트레킹을 시작한 후로 처음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원시상태의 거대한 산에서 만난 한국 사람은 핏줄처럼 반가웠다. 원주 산악회에서 왔다는 39세의 그 남자는 정상까지 올랐고 이제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분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시들어가다가 비를 맞고 되살아나는 식물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건 김치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처럼 김치를 먹게 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흔히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표현이겠지만 정말 한국 사람은 김치 없인 못 사나보다. 어쩔 수 없는 태생이다.
줄곧 먹어본 호박전이었지만 그날을 차라리 최고의 사치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 같았던 그분과 아쉬운 이별을 한 뒤 우리는 또 우리의 갈 길을 재촉해야 했다.
팡보체에서 페르체까지 가는 길은 그때까지의 어떤 코스보다 힘들었다. 돌길이 많았으며 길이 좁아서 언니와 나란히 갈 수조차 없었다. 둘이 가기엔 길이 좁아서 언니에게 내 잠바에 있는 모자를 잡아라고 하고 앞장을 섰다. 그때까진 옆에서 언니를 부축하고 갔지만 이젠 한 줄로 서서 가야하는 것이다.
언니도 나도 모두 힘들고 불안해진 자세였다.
목마름에 타버릴 것 같았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몸무게만큼의 쇳덩이를 옮기는 것 같았다. 경국 중간에 천근만근 무거워져 내 어깨를 찍어 내리던 가방을 가이드한테 맡겼다. 언니는 몸 상태가 최악이어서 업혀서 가다가 걸어 가다를 반복했다.
왜 내가 이러고 있을까.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만두자.
그런 생각들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아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지금 포기한다면, 앞으로 무슨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이유를 대며 포기하게 될 것이다. 비겁한 도망자가 되길 바라는가? 나의 한계를 스스로 그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자.
또한 나는 지금 나 개인의 이름만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들의 이름을 대신 걸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상에 우뚝 섬으로써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 나는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고 도 도전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펼쳐보여야 했다.
힘든 코스라 도중에 자주 쉰 탓에 페르체에 도착했을 땐 밤이었다. 컴컴한 밤길을 손전들을 의지해서 가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21일에는 투크라(4620미터)에 도착했다. 이제 점점 정상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고통의 강도가 강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투크라 롯지의 특징은 창문도 없고 방문도 없다는 것이다. 커튼이 곧 방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화장실이 없다는 것도 참 흥미로웠다.
투크라는 날씨가 추웠는데 그래서인지 언니의 건강은 더 나빠졌다. 여기 사람들은 추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난로를 피우는데 그것이 오히려 악순환이었다. 고산지대라서 산소가 희박하지만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난로를 피워야 하니까 말이다. 난로 속에 들어가는 땔감은 야크 동이었다. 야크 똥 말린 것을 집밖에다 한 1-2미터 정도 쌓아놓고 꺼내어서 썼다.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참 다양한 것 같다.
바람이 너무 심해 햇볕이 따뜻해도 따뜻한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고지가 바로 코앞인 것 같은데 심리적 거리감은 더 멀어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히말라야는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12월23일, 드디어 정상에 오르는 날, 새벽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목표일정이 다 되어가서인지 두 번이나 엄마와 경아가 꿈에 보였다. 아무래도 전화 통화라도 하고 풀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나 계속 엄마 꿈 꿨어. 어제도. 그저께도"
"나도 계속 니 생각했다 야!"
엄마의 목소리도 들떠 있었다.
"엄마, 지금 여기 5050미터인데 오늘 칼라파타르 5545미터까지 올라갈 거야!"
"중간에 실패했니?"
"아니, 고소 적응하느라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반복했지."
"우와! 주위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엄마, 보고 싶다"
"나도 니가 없으니 외롭다 야~!"
주위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엄마, 엄마 목소리는 언제나 나에게 차분하면서도 힘 있게 나의 방향을 일러주었다.
아침을 먹고 드디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이제 1미터, 1미터가 달랐다. 정말 산소가 없구나, 하는 감이 팍팍 와 닿았는데 그건 바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증세로 나타났다. 정상은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도착되지 않을 것처럼 또한 그렇게 까마득했다.
언니가 못하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도저히, 도저히 난 안되겠어."
언니가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지금까지 고생한 게 아깝기도 했고, 마음은 끝까지 가고 싶은데 체력이 떨어진 소영언니가 안타까워서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언니는 몇 번이나 다시 결심을 하고 정상을 향해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하지만 결국 에베레스트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5천4백 미터에서 언니는 주저앉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잠시 쉬면서 언니의 기력이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불가능했다. 고산증세가 너무 심했고 체력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진 터였다.
몹시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 계속 전진할 수밖에.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검은 돌' 칼라파타르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온 힘을 다 내어 숨을 가파르게 몰아쉬면서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무아지경으로 오르고 있었다. 숨은 갈수록 더 거칠어졌다. 그 순간, 순간의 숨과의 싸움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그래. 여긴 히말라야야. 신이 주신 이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내 몸속에 들어가고 있어. 나는 이 공기를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하며 살아갈 거야."
그래서인가 숨은 다시 고르게 쉬어지기도 했다. 산과 내가 일체가 되었던 것일까.
아, 이제 정상이다. 나 한경혜가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가자 감격과 희열이, 탁 트인 풍경보다 먼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힜는 힘껏 소리 질렀다. 뺨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야호! 한경혜! 넌 네 인생의 주인공이야."
내가 히말라야 칼라타파르 정상에서 내뱉은 첫 말은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그 정상에 서는 순간, 나는 당당하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엄마! 고마워요. 나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 경아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주고 싶은 한마디를 더 잊지 않았다. "엄마, '오랑'해!"
목이 아프도록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벅찬 감동 때문에 내 가슴이 터져버릴 거 같았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더불어 내 존재의 한 축인 엄마와 경아 생각밖에는 더 이상 떠오르질 않았다. 해냈다는 성취감은 자신감과 사랑으로 나를 충만하게 했다. 아마도 그런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제 세상 살아가며 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히말라야에서 신을 보았어. 아무리 어려워도 난 못해낼 게 아무것도 없어"
8일 동안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고 나는 멋진 자격증을 하나 장만하게 된 것이다. '불가능은 없다.'라고 적힌 자격증.
얻어낸 것은 만 배 백일기도로 얻어진 힘과는 또 다른 벅찬 새로운 에너지로 나를 이끌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등정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오랑해'에 대해 물었다.
평소에 내가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라고 하면 엄마는 늘 "나는 하나 더 보태서 오랑해."라고 말씀하셔서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눈부신 붉은 태양 햇살 같은 벅찬 기운을 고스란히 품은 채 내려와 지쳐있는 소영언니를 먼저 찾았다. 언니는 내게 어땠냐고 묻는다. 코앞까지 와놓고 정상에 오르지 못했으니 언니가 얼마나 많이 속상해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짐짓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저 에베레스트를 보았을 분이댜. 직접 올라가서 보는 것과 여기서 보는 것과 똑같아. 단지 힘들게 올라갔다는 것뿐이지."
언니가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나 역시도 언니가 없었으면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둘이였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해가 지기 시작하고 별 하나가 반짝하더니 내가 올랐던 산 어머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금세 컴컴해졌다.
소영언니는 고산증세 대문에 아파서 포터랑 가이드랑 번갈아서 업었고 우리들은 도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이라 더 추운데다 헤드램프도 아닌 방송 조명기구 하나를 의지해서 가려니까 그 하산 길도 만만치 않았다.
다소 흥분이 가라앉는 듯 하더니 베이스캠프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왔다.
얼굴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너무 다가워 손도 댈 수 없었다. 찬 바람에 스치고 옷에 부딪히는 턱 부분은 물론이고 피부 어떤 부분도 물만 닿으면 따가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은 너무 다가워 흘리지 조차 못했다.
지친 몸을 침대에 던졌는데 이상하게 몸은 자꾸 아래로 떨어지는데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때 그 시간이 아침시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혹시 나도 성공했을지 모르는데......"
소영언니의 가느라란 목소리가 침묵의 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
"경혜야. 나 그래도 5400미터까지 올라갔다는 게 대단하지 않니?"
"그럼! 언니. 그 정도까지 올라간 것도 대단한 거야. 정말 대견해, 언니."
그랬다. 소영언니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낯선 곳을, 그것도 자갈로 이루어진 가파른 돌산을 오르는 일은 우리가 상상하는 추측 이상으로 힘들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의 체력이 소모되고 신경이 쓰여 금방 탈진할 것이다. 그런데 5400미터까지 앞을 못 보는 상태로 올랐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다른 정상인들도 그 전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마도 많을 듯싶다.
고상증세가 좀 덜 하고 시간이 충분했다면 언니도 분명 오를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 짧은 여행 속에서 사람과 자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자연 사이를 이어주고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창조해 준다. 사람을 알려면 여행을 해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소영언니와는 이번 여행을 통해 더욱 가까워졌고 더불어 나는 자연의 경외감을 더 한층 갖게 되었다.
산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히말라야 크레킹의 보너시이다. 그 산은 분명 나를 크고 소중한 인격체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어주었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히말라야 산 아래서의 마지막 하룻밤을 보냈다.
내게 26살의 겨울이야기를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몰골은 더 이상 말이 아니었다. 냄새로 진동을 했다.
그 진한 땀 냄새만큼 나는 다시 한번 무엇이든 내가 하려고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음을 은은히 느끼고 있었다. 다 버렸다고 해도 저 깊은 곳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찌꺼기, 내가 장애인이라서 느껴야 했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웃으면서 털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히말라야 트레킹 일정을 장애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일정과 코스를 맞춰 구성했다면 정상에 올랐어도 내가 원하는 성취감을 맛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산을 오르고 있을 때, 고산증세와 여러 가지 이유로 정상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모두 정상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포기하고 우리는 해냈다.
다시 한번 글을 쓰기 위해 그 때를 회상해본다.
히말라야 여정은 그야말로 인생을 닮아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으며 눈으로 봤을 땐 힘들어 보이지 않던 곳이 실제 올라가기에는 너무 힘들었으며, 좀 괜찮아졌다 싶으면 금방 또 다시 힘들어지는 코스가 나타나곤 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어려움도 인생에서처럼 우리의 무릎을 꺾이게 했다.
그렇게 히말라야 트레킹은 힘들었지만 내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어렵고 힘든 일은 그것을 겪을 당시에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힘들었지만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니고 좋은 기운만 내게 남는다는 사실도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한번 절실하게 와 닿는 사실은 절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절을 해온 탓에 내 체력은 일반인들보다 강했던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만 배 백일기도를 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만 탁 죽었으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 극한의 고통을 진저리날 만큼 겪은 나로서는 히말라야 트레킹이 주는 육체적 고통은 견딜 만 했던 것이다.
절은 내 인생에 있어 그렇게 언제나 큰 에너지였다.
정상에 섰을 때 나는 느꼈었다. 우리 인간의 진짜 장애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마 나는 그것을 알기 위해,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그 힘든 히말라야 트레킹을 완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