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형식과 개념
형식과 개념
신화의 기표는 애매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의미인 동시에 형식이고, 한편으로는 가득 차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어 있다. 의미로서의 기표는 이미 독서를 전제로 하고 있고, 나는 눈으로 그 기표를 파악하며, 그 기표는 (순전히 정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언어학적 기표와는 반대로) 감각적인 현실을 가지고 있다. 그 기표는 풍부함(richesse)을 가지고 있다. 사자의 명명, 흑인의 경계는 그럴 듯한 완전체이고, 그것들은 충분한 합리성을 이용한다. 언어학적 기호의 총체로서 신화의 의미는 하나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사자의 이야기 혹은 흑인의 이야기라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이다. 즉, 의미 속에 하나의 의미작용이 이미 구축되어 있으서, 만일 신화가 그 의미작용을 포착하지 못하고 갑자기 그것을 텅빈, 기생하는 형식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 의미작용은 그 자체로도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는 이미 충만하고, 의미는 하나의 지식, 하나의 과거, 하나의 기억을, 그리고 일련의 사실, 관념, 결정의 상대적 질서를 전제로 한다.
의미는 형식이 되면서 그 우연성을 잃는다. 의미는 비게 되고, 빈약해지고, 이야기는 사라지고, 문자만이 남게 된다. 여기에 독서작업의 역설적인 치환이 있고, 의미에서 형식으로, 언어학적 기호에서 신화적인 기표로의 비정상적인 역행이 있다. 만일 quia ego nominor leo를 순전히 언어학적인 체계 속에 가둬둔다면, 그 문장은 거기에서 의미의 충만함, 풍부함, 하나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다. 즉, 나는 한 마리의 동물이고, 한 마리의 사자이고, 나는 이러이러한 나라에서 살고 있고, 나는 사냥에서 돌아오고, 내가 내 먹이를 한 마리의 염소, 암소, 젖소와 나누는 것을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힘이 센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모든 몫을 전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마지막 이유는 단순히 내 이름이 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형식으로서의 그 문장은 이런 긴 이야기의 어떤 것도 더 이상 내포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하나의 역사, 지리학, 윤리, 동물학, 하나의 문학이라는 가치 체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형식은 이 풍부함을 모두 멀리했다. 형식의 그 새로운 빈곤이 하나의 의미작용을 요청하게 되고, 이 의미작용이 그 빈곤을 가득 채운다. 문법의 예와 대체되기 위해서는 사자의 이야기를 포기해야 하고, 이미지를 해방시키고, 이미지로 하여금 그 기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흑인의 전기를 잠시 제쳐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중요한 점은 형식이 의미를 제거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형식은 다만 의미를 빈약하게 하고, 멀리 떨어뜨려 놓을 뿐이고, 형식은 의미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의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우예된 죽음이다. 즉, 의미는 그 가치를 잃지만 생명은 유지하는데, 신화의 형식이 그 의미를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게 된다. 의미는 형식에 있어 즉석에서 불러올 수 있는 이야기의 저장고와 같고, 종속된 재산과 같은 것이어서 재빨리 교대로 불러오고 멀리할 수 있다. 끊임없이 형식은 의미 속에 뿌리를 내려 거기에서 본질을 자양분으로 취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형식은 의미 속에 숨을 수 있어야 한다. 신화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의미와 형식 사이의 숨바꼭질이라는 이 흥미진진한 게임이다. 신화의 형식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다. 경례하는 흑인은 프랑스 제국의 상징이 아니다. 그는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현전을 가지고 있고, 그는 풍부하고, 체험되고, 자연스럽고, 순진무구하고, 논의의 여지없는 하나의 이미지로 행세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현전은 순종적이고, 멀리 덜어져 있고, 투명한 것처럼 되어 있고, 그 현전은 약간 뒤로 후퇴하여 단단히 무장한 채 그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개념, 즉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이라는 개념과 결탁하게 된다. 즉, 그 현전은 차용된다.
이제 기의를 살펴보자. 형식을 벗어나 흐르는 이 이야기를 모두 흡수하게 되는 것이 바로 개념이다. 개념은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역사적인 동시에 의도적이다. 개념은 신화를 말하게 하는 동기이다. 문법적인 예가 되는 성질,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신화의 욕구(pulsion)자체이다. 개념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동기와 의도의 고리를 다시 세운다. 형식과 반대로 개념은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상황으로 가득 차 있다. 개념에 의해 신화 속에 도입되는 것은 곧 하나의 새로운 역사이다. 그 우연성이 미리 제거된 사자의 명명 속에서 문법의 예는 곧 나의 실존을 요청하게 된다. 즉, 라틴어 문법이 교육되던 그런 시기에 나를 태어나게 한 시간, 사회적인 차별작용에 의해 라틴어를 배우지 않는 아이들과 나를 구별하는 역사, 이솝이나 혹은 페드르 속에서 이런 예를 선택하게 하는 교육 전통, 속사일치 속에서 예증될 만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보는 나 자신의 언어학적 습관들이 바로 그것이다. 경례하는 흑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으로서의 그 의미는 간단하고, 고립되어 있고, 빈약하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의 개념으로서의 의미는 세계의 총체성(totalite)에 또다시 연결된다. 즉, 프랑스의 일반 역사에, 그 식민지 모험에, 프랑스의 당면한 어려움에 연결된다. 사실 개념 속에 투여되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어떤 인식이다. 의미에서 형식으로 이행하면서 사진은 지식을 잃는다. 이는 개념의 지식을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신화적인 개념 속에 내포된 지식은 한없는 약한 연상들로 형성된 막연한 지식이다. 개념의 이러한 열린 성격에 대해 강조해야한다. 이것은 결코 추상적이고 정화된 하나의 본질이 아니다. 이것은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불안정하고 애매한 응축으로, 그것의 통일성-일관성은 특히 기능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적인 개념의 근본적인 특징은 바로 점유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법적인 예가 되는 성격은 한정된 학생들의 부류와 정확하게 관계되고,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다른 그룹이 아닌 이런 독자 그룹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즉, 개념은 하나의 기능에 밀접하게 대응하고, 그것은 하나의 경향으로 정의된다. 이는 프로이트에게 있어 그 체계의 제2항은 곧 꿈, 실현되지 않은 행위, 신경증의 잠재된 의미(내용)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행위의 두번째 의미가 행위의 진정한 의미, 즉 완전한 심층의 상황에 적합한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화적인 개념처럼 행위의 의도 자체이다.
하나의 기의는 여러 개의 기표를 가질 수 있다. 이는 특히 언어학적인 기의와 정신분석학적인 기의의 경우이다. 또한 신화적인 개염늬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음대로 무제한적인 다수의 기표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속사일치를 내게 보여 주는 수많은 리틴 문장들을 찾아낼 수 있고, 내게 프랑스의 제국주의 성격을 의미하는 수 많은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양적으로 개념이 기표보다 휠씬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개념은 종종 다시 나타날 뿐이다. 형식과 개념 사이에 빈곤함과 풍부함은 반비례한다. 즉, 빈곤해진 의미인 주탁자인 형식의 질적인 빈곤함에 역사 전체로 열려진 개념의 풍부함이 대응한다. 그리고 형식의 양적인 풍부함에는 적은 수의 개념이 대응한다. 상이한 여러 형식들을 통한 개념의 이런 반복은 신화학자에게 중요한 것으로, 이런 반복이 신화를 판독하게 해준다. 즉, 어떤 행동의 강조는 그 의도를 드러내 준다. 이것은 기의의 크기와 기표의 크기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언어에서 이런 관계는 균형이 잡혀 있어, 이 관계는 단어 혹은 적어도 구테적인 단위를 거의 초과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화에서 개념은 기표의 매우 넓은 영역을 통해 확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권의 책 전체는 단 하나의 개념의 기표가 될 것이다. 역으로 작은 하나의 형식(하나의 단어, 하나의 몸짓, 그것이 주목되기만 한다면 사소한 몸짓) 조차도 매우 풍부한 이야기로 부풀려진 하나의 개념에 기표로 사용 될 수 있을 것이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이런 불균형이 언어의 경우에는 흔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화에 특유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에게 있어 실현되지 않은 행동은 그것이 드러내는 고유한 의미와 비례하지 않은 얄팍한 기표이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신화적 개념들 속에는 어떤 고정성(fixite)도 없다. 그 개념들은 만들어질 수도 있고, 교체되고 해체되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바로 그 개념들은 만들어질 수도 있고, 교체되고 해체되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바로 그 개념들은 역사적이기 때문에 역사는 쉽게 그 개념들을 제거할 수 있다. 이 불안정성으로 인해 신화학자는 적항한 전문용어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것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전문용어가 종종 아이러니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즉, 신조어의 문제이다. 개념은 신화의 구성요소이다. 신화들을 판독하고자 할 때 우리는 개념들을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전은 우리에게 선(bonte), 자비(charite), 건강(sante), 인성(humanite)등의 몇몇 개의 개념들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개념들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개념들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자주 필요로 하는 것은 제한된 우연성에 연결된 순간적인 개념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신조어가 불가피하다. 중국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때에 프랑스의 프티부르주아가 중국에 대해 만들 수 있었던 관념은 그 사실과는 다른 사실이다. 방울, 인력거, 그리고 아편굴의 이러한 특수한 혼합의 경우에는 중국적 특징(sinite) 이라는 단어 이외의 다른 단어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멋지지 않은가? 개념적 신조어가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적어도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 신조어는 매우 양식 있는 비례구칙에 따라 구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