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적 체계로서의 신화
파롤에 대한 연구로서 신화학은 사실상 40여 년 전에 소쉬르가 <기호학>이라는 이름으로 가정했던 방대한 기호들의 과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호학은 아직 구축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쉬르 이래로, 그리고 때로는 그와는 관계 없이 현대의 일부 연구 분야는 끊임없이 의미작용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직관 심리학, 그리고 바슐라르가 그 실례를 제공한 문학 비평의 몇몇 새로운 시도들은, 사상이 의미하는 경우에만 사상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런데 하나의 의미작용을 가정하는 것, 그것은 기호학에 의지하는 것이다. 기호학이 모든 이런 연구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연구들은 상이한 내용을 가지도 있다. 그러나 그 연구들은 하나의 공통 법규를 가지고 있는데, 즉 그것은 모두 가치의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 연구들은 사상을 발견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 연구들은 사상을 해당 가치(valant - pour)로 규정하고 연구한다.
기호학은 형식의 과학이다. 왜냐하면 기호학은 그 내용과는 관계없이 의미작용들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형식과학의 필요성과 한계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요성, 그것은 모든 정확한 언어활동의 필요성 자체이다. 주다노프는 <지구의 구형구조>에 대해 이야기했던 철학자 알렉산드로프를 비웃었다. 『지금까지는 형식만이 구형일 수 있었던 것 같았다』라고 주다노프는 말한다. 주다노프가 옳았다. 우린느 더 이상 형식이라는 용어로 구조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삶>의 차원에는 구조들과 형식들을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총체성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과학이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과학은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종합에 대한 어떤 돈 키호테식의, 게다가 안타깝게도 플라톤적인 그런 사고와는 반대로 모든 비평은 인위적인 분석이라는 고행에 따라야 하며, 분석 속에 제 방법들과 언어활동을 맞추어야 한다. <형식주의>의 망령에게 위협을 덜 받았다면 역사 비평은 아마도 덜 빈약했을 것이다. 그 비평은 형식에 대한 특수한 연구가 역사과 총체성의 필수적인 원칙과 조금도 상치되지 않는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체계가 특수하게 그 형식 속에 한정되면 될수록 그 체계는 역사 비평에 더 순응하게 된다. 유명한 말을 흉내내자면, 약간의 형식주의는 역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많은 형식주의는 역사로 귀착된다. 사르트르의 《성(聖) 주네, 희극배우와 순교자》에서, 형식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기호학적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신성에 대한 묘사보다도 더 나은 총체적 비평의 예가 있는가? 위험한 것은 반대로, 예를 들어 주다노프의 리얼리즘처럼 형식들을 반(半)은 형식이고, 방은 실질인 애매한 대상들로 간주하는 것이고, 형식에 형식의 실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기호학은 그 한계 속에서 제시되었지만 형이상학적인 함정은 아니다. 기호학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하나의 과학이다. 중요한 것은 설명의 통일성이 이러저러한 그 접근들의 축소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엘겔스의 말대로 설명에 참여한 특수과학의 변증법적인 조정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신화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화학은 형식의 과학으로서 기호학인 동시에 역사과학으로서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즉, 신화학은 형식 속의 관념을 연구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호학은 하나의 기표와 하나의 기의라는 두 항 사이에 하나의 관계를 상정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 관계는 서로 다른 차원의 대상들에 기인하므로 그 관계는 등식관계가 아니라 등가관계이다. 여기에서 기표가 기의를 표현한다고 단순히 말하는 일반 언어활동과는 반대로, 나는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의 상이한 항들을 지닌 모든 기호학적 체계를 다룬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포착하는 것은 하나의 기의에 대한 하나의 기표라는 하나의 항이 아니라, 기표와 기의 둘을 연결하는 상관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표, 기의. 그리고 기표와 기의라는 두 항의 결합체인 기호가 있다. 장미꽃 다발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그 장미꽃 다발로 나의 열정을 의미하게 한다. 여기에는 기표와 기의, 즉 장미꽃과 나의 열정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여기에는 <열정이 담긴> 장미꽃만이 있다. 그러나 분석의 측면에서는 세 개의 항이 있다. 왜냐하면 이 열정이 담긴 장미꽃들은 장미꽃과 열정으로 완전하고 정확하게 분해되기 때문이다. 장미꽃과 열정 이 양자는 서로 결합하여 제3의 대상, 즉 기호를 형성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상 경험의 측면에서 장미꽃이 지닌 메시지와 장미꽃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석의 측면에서 기호로서의 장미꽃과 기표로서의 장미꽃을 혼동할 수 없다. 즉, 기표는 비어 있고 기호는 가득 차 있으며, 그 기호는 하나의 의미이다. 다음으로 검은 조약돌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그 검은 조약동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의미하게 할 수 있는데, 조약돌은 단순한 하나의 기표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 조약돌에다 결정적인 하나의 기의를 부여한다면(예를 들어 무기명 투표에서의 사형 선고), 그것은 하나의 기호가 된다. 물론 기표, 기의, 그리고 기호 사이에는 그런 분석이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만큼 밀접한 기능적 내포관계 (전체에 대한 부분의 내포관계처럼)가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이 기호학적 구조로서의 신화연구에 있어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세 항들은 순전히 형식적이어서 그 항들에 상이한 내용들이 부여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특수한,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본보기가 되는 기호학 체계인 언어에 대해 연구한 소쉬르에게 있어서는 기의는 곧 개념이고, 기표는 곧(정신적 차원의) 청각적 이미지이며, 개념과 이미지의 관계는 곧 기호(예를 들어 단어) 혹은 구체적 실체이다. 프로이트의 경우, 다 알다시피 정신 현상은 등가의, 하당 가치의 두께를 지닌다. 하나의 항은(그 항에다 우수성을 부여하지는 않겠다) 행동의 명백한 의미에 의해 구성되고, 다른 항은 잠재된 의미 혹은 고유의 의미(꿈의 기층이 이 예이다)에 의해 구성된다. 세번째 항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 두 항의 상관관계이다. 그것은 전체로 보아 꿈 그 자체이며, 하나의 형식(첫번째 항)과 의도적인 기능(두번째 항)의 접합 덕분에 이루어진 구조물, 타협으로 간주된 실현되지 않은 행위 혹은 신경증이다. 여기에서 기표와 기호를 구분하는 것의 필요성을 알 수 있다. 즉, 프로이트에게 있어 꿈은 그 잠재된 내용도 그 명백한 여건도 아니고, 그것은 두 항의 기능적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잘 알려진 이 세 가지 실례로 만족하겠다) 사르트르의 비평에서 기의는 주체의 원초적 위기(보들레르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의 이별, 주네에게 있어서는 도둑질의 명명)에 의해 구성된다. 담론으로서의 문학은 기표를 형성한다. 그리고 원초적 위기가 담론의 관계가 작품을 결정하는데, 이 작품이 곧 의미작용이다. 당연히 이런 3차원적 도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불변한다 해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무로 기호학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층위에서만 단지 통일성을 가질 수 있다고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기호학의 장은 제한되어 있어 기호학은 언어활동만을 대상으로 하고, 그것은 단 하나의 작업, 즉 독서 혹은 판독만을 알고 있다.
신화 속에서도 앞어 이야기한 기표, 기의, 그리고 기호라는 3차원의 도식이 발견된다. 그러나 신화는 신화 이전에 존재하는 기호학적 연쇄에서 출발해 세워진다는 점에서 특수한 체계이다. 즉, 이것은 제2의 기호학 체계이다. 제1체계에서 기호(즉, 개념과 이미지의 결합체)는 제2체계에서 단순한 기표가 된다. 여기에서 신화적 파롤의 질료들(이른바 언어, 사진, 회화, 광고, 대상 등)이 처음에는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그 질료들이 신화에 의해 포착되는 순간 순수하게 의미하는 기능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신화는 그 질료들 속에서 하나의 동일한 원료만을 본다. 그들의 통일성은 바로 그 질료들이 언어활동이라는 단순한 지위로 모두 환원된다는 것이다. 문자표기를 다루든 혹은 그림표기를 다루든지 간에, 신화는 거기에서 기호학적인 첫번째 연쇄의 마지막 항인 전체적 이호, 기호의 총체만을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최종항이 그것이 만들어내는확대된 체계의 첫번째 항 혹은 부분 항이 된다. 모든 것은 마치 신화가 첫번째 의미작용의 형식적 체계를 한 단계 옮긴 것처럼 진행된다. 이러한 이동은 신화분석에 있어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 이동을 소개하기로 한다. 물론 여기에서 도식의 공간화는 단순한 하나의 은유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화에는 두 개의 기호학 체계가 있는데,
그 한 체계는 다른 체계에 비해 상자 밖으로 벗어나 있다. 언어학적 체계, 즉 언어(혹은 그와 유사한 여러 가지 표현 양식들)를 대상언어활동(langage-objet)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가 자기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탈취한 언어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화 자체는 그 언어 속에서 첫번째 언어에 대해 이야기되는 두번째 언어이므로, 메타 언어활동(meta-langage)이라 부르겠다. 메타 언어활동에 대해 고찰하는 기호학자는 대상 언어활동의 구성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던질 필요가 없고, 언어학적 구조의 세부사항에 대해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기호학자는 그것의 총체적 항혹은 전체 기호만을, 단지 이 항이 신화에 참여하게 되는 한 알아야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호학자는 문자와 이미지를 도일하게 취급할 근거가 있다. 그가 문자와 이미지에서 취하는 것, 그것은 문자와 이미지 둘 다 모두 기호라는 것이고, 의미하는 도일한 기능이 부여된 문자와 이미지는 신화의 출발점에 이르러 둘 다 모두 대상 언어활동을 구축한다.
이제 신화적 파롤의 한두 가지 예를 제시하겠다. 발레리의 고찰[《텔 켈 Tel Quel》2,p.191]에서 첫번째 예를 빌려오겠다. 나는 프랑스 국립중학교 2학년 학생(프랑스의 교육제도에서는 중학교는 제6학년부터 시작한다.)이다. 나는 라틴어 사전을 펼치고 그 속에서 이솝 혹은 페드르에서 따온 문장을 한 줄 읽는다. quia ego nominor leo.나는 잠시 중단하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한편으로 이 글에서 단어들은 나는, 내 이름은 사자이기 때문이다라는 단순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문당은 분명히 내게 다른 것을 의미하려고 한다. 그 문장이 중학교 2학년 학생인 나에게 이야기를 걸 때, 그 문장은 『나는 속사일치 규칙을 애증하는 문법의 한 예이다』라고 분명히 내게 말하고 있다. 그 문장이 전혀 자신의 의미를 내게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즉 그 문장은 사자에 대해, 그리고 사자가 자신을 명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조금도 내게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문장의 진정한 최종 의미작용은 바로 어떤 속사일치의 존재 여부로서 내게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로까지 확장되기 때문에, 나는 확대된 특수한 하나의 기호학적 체계 앞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하나의 기표가 있다. 그러나 이 기표는 기호의 총체에 의해 형성되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첫번째 기호학적 체계(내 이름은 사자이다)이다. 나머지의 경우에도 형식적 구조는 정확히 전개된다. 하나의 기의 (나는 문법의 한 예이다)가 있고 총체적인 의미작용이 있는데, 이는 기표와 기의의 상관관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자의 명명도, 문법의 보기도 내게는 분리되어 따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또 다른 예가 있다. 나는 이발소에 있다. 이발사가 《파리 마치》 한 권을 내게 내민다. 책표지 위에 프랑스 군복을 입은 한 흑인 젊은이가 눈을 들어 삼색기에 잡힌 주름을 바라보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이미지의 의미이다. 그러나 순진하건 아니건 나는 이 이미지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즉,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라는 것, 모든 프랑스의 아들은 피부색의 구분 없이 그 국기 아래 충심으로 봉사한다는 것,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해 비방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른바 압제자들에게 충성하는 이 흑인의 열정보다 더 훌륭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확대된 기호학적 체계를 앞에 두게 된다. 즉, 선행하는 체계로 이미 형성된 하나의 기표가 있다(한 흑인 병사가 프랑스식 거수경계를 한다). 하나의 기의가 있다(여기에서는 프랑스적인 특성과 군대적 특성의 의도적인 혼합이다). 마지막으로 기표를 통한 기의의 현존이 있다.
신화적 체계의 각 항의 분석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전문용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좋다. 주지하다시피 이제 기표는 신화 속에서 두가지 관점에서 검토될 수 있다. 즉, 언어학적 체계의 마지막 항으로서, 혹은 신화적 체계의 첫번째 항으로서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명칭이 필요하다. 언어의 측면에서, 즉 제1체계의 마지막 항으로서의 기표를 의미(sens: 내 이름은 사자이다. 흔인이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한다)라고 부르기로 한다. 신화의 측면에서는 기표를 형식(forme)이라 부르겠다. 기의의 경우에는 모호한 점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기의에다 개념(concept)이라는 명칭을 남겨놓기로 한다. 세번째 항은 이 두 항의 상관관계이다. 언어의 체계에서 그것은 기호(signe)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취할 경우 애매한 점이 생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그리고 바로 거기에 그 중요한 특징이 있다) 기표는 이미 언어의 기호들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화의 세번째 항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부르겠다. 여기에서 그 단어는 신화가 효과적으로 이중의 기능을 가지는 만큼 더욱더 정당화된다. 즉, 신화는 지칭하면서 통고하고, 이해시키면서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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