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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야기/Kunst Theorie

282 의미작용

의미작용


 기호학에서 세번째 항은 앞에서 살표보았듯이 처음 두 항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분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항이고, 실제로 소비되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의미작용(signigication)이라고 불렀다. 이미 살펴본 대로 소쉬르의 기호가 단어(혹은 더 정확하게는 구체적 실체)인 것처럼 의미작용은 신화 자체이다. 그러나 의미작용의 특징들을 제시하기 전에 의미작용이 준비되는 방식에 대해, 즉 신화적 개념과 형식의 상관관계의 양식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신화에서는 (다른 기호학적 체계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반대로) 처음 두 항이 완전히 뚜렷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하나의 항이 다른 항 뒤에 <감춰지지> 도 않고, 그 두항이 (하나는 여기, 또 하나는 저기가 아니라) 모두 여기에 주어진다. 이것이 아무리 역설적인 것처럼 보여도 신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신화의 기능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이다. 형식에 대한 개념의 어떤 잠복상태도 없다. 신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의식이 전혀 필요 없다. 분명히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표명(manifestation)이 다루어진다. 즉, 형식의 존재는 자의적(litteral)이고 직접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넓이를 갖는다. 이것은 신화적 기표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언어학적 성격 때문이다. 그것을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즉, 신화적 기표는 이미 지시된 의미에 의해 구축되었기 때문에 그 기표는 하나의 질료를 통해서만 제공 될 수 있다(반면 언어에서 기표는 정신에 관계되는 것이다). 구전신화의 경우 이런 외연(extension)은 선조적(lineaire)이다. (내 이름은 사자이기 때문이다). 시각적 신화의 경우 외연은 다차원적이다.( 중앙에는 흑인의 군복, 위에는 그의 검은 피부의 얼굴, 왼쪽에는 거수경례 등). 따라서 형식의 구성요소들은 그들 사이에 위치관계, 인접관계를 갖는다. 즉, 형식의 존재 방식은 공간적이다. 반대로 개념은 총체적으로 주어지고, 그것은 일종의 성운처럼 지식이 다소 의미하게 응축된 형태이다. 개념의 구성요소들은 결합관계로 연결된다. 즉, 개념은 넓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께(이 은유가 지나치게 공간적이기는 하지만)에 의해 유지되고 그 개념의 존재 방식은 기억에 의존한다.

 신화의 개념을 의미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형관계이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의 체계처럼 복잡한 기호학적 체계와의 어떤 형식적인 유사성이 발견된다. 츠로이트에게 있어 행동의 잠재 의미가 그 행동의 겉으로 드러난 의미를 변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화에서도 개념이 의미를 변형시킨다. 물론 이런 변형은 신화의 형식이 이미 언어학적 의미에 의해 구축되었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다. 언어와 같이 단순한 테계에서 기의는 아무것도 변형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비어 있고 자의적인기표는 기의에 어떤 저항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기표는 말하자면 두 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가득 차 있는 측면으로, 그것은 곧 의미이다(사자의 이야기, 흑인 병사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는 측면으로, 곧 형식이다(왜냐하면 나는, 내 이름은 사자이기 때문이다 / 그 삼색-기에-경례하는-프랑스-흑인-병사), 개념이 변형시키는 것은 바로 가득 차 있는 측면, 즉 의미이다. 사자와 흑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박탈당하고 제스처로 변화된다. 라틴어의 예가 되는 성격이 변형시키는 것은 바로 그 우연성 속에서의 사자의 명명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방해하는 것 또한 첫번째 언어활동으로, 즉 내게 군복을 입은 흑인이 경례를 이야기해 주었던 사실 담화이다. 그러나 이런 변형은 의미의 제거가 아니다. 사자와 흑인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고, 내며은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 사자와 흑인은 절반으로 축소되고, 그 들에게서 실존이 아니라 기억이 제거된다. 그것들은 완고하게 말ㅇ벗이 자리잡고 있는 동시에 수다스러우며, 전부 개념을 위해 대기중인 파롤이다. 개념은 문자 그대로 의미를 변형시키지만 제거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념은 의미를 소외시킨다. 

 항상 상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신화가 이중 체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에서는 일종의 편재 형상이 나타난다. 즉, 신화의 출발은 한 의미의 도래에 의해 구축된다. 이미 그 대략적 특징을 강조한 바 있는 공간적인 은유를 사용하여 이야기하자면, 신화의 의미작용은 끊임없이 도는 일종의 회전문에 의해 구축된다. 이 회전문은 기표의 의미와 그 형식을, 대상 언어활동과 메타 언어활돌을, 순전히 의미하는 의식과 순전히 상상하는 의식을 교대로 나타낸다. 이런 교체는 지적인 동시에 상상적인, 자의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애매한 하나의 기표처럼 그 교체를 이용하는 개념에 의한 한덩어리를 이룬다. 

 그런 메케너즘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내포의미를 속단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신화 속에서의 기표의 편재가 바로 알리바이(alibi: 알다시피 이 단어는 공간적인 용어이다)의 물리학을 재생한다고 지적한다면, 객관적 분석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알리바이 속에도 부정적인 동일관계에 의해 연결된 가득 찬 장소와 텅빈 장소가 있다(<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경찰관처럼) 일상적인 알리바이는 종말을 가지고 있고, 현실이 어느 순간 그 알리바이가 바뀌는 것을 중단 시킨다. 신화는 하나의 가치이고, 신화는 보증할 진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어떤 것도 신화가 영원한 알리바이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신화는 그 기표가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언제나 다른 곳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의미는 형식을 제시하기 위해 언제나 그곳에 있다. 형식은 의미를 멀리하기 위해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리고 의미와 형식 사이에는 모순, 갈등, 분열이 전혀 없다. 의미와 형식은 결코 동일한 지점에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자동차 속에서 차창을 통해 풍경을 바라본다면, 나는 풍경이나 혹은 차창에 기꺼이 초점을 마출 수 있다. 때로 나는 창문의 현존과 풍경의 거리를 포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자택일의 결과는 동일할 것이다. 차창은 내게 현존하는 동시에 비어 있을 것이고, 충경은 내게 비현실적인 동시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신화적인 기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속에서 형식은 비어 있지만 현존하고, 의미는 부재하지만 가득 차 있다. 내가 형식과 의미의 이 회전물은 기꺼이 중단시킬 경우, 내가 서로 다른 별개의 대상처럼 형식과 의미 그 각각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리고 판독이라는 정태적인 방법을 신화에 적용할 경우, 간단히 말해서 내가 신화 고유의 역학을 항해할 경우, 그런 경우에만 나는 이런 모순에 대해 놀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신화의 독자의 상태에서 신화학자의 상태로 이행할 경우에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기표의 이런 이중성이 의미작용의 특징들을 경정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신화가 그 문자에 의해서보다는 그 의도(나는 문법의 한 예이다)에 의해 결정된 하나의 파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의도가 신화 속에서 문자에 의해, 말하자면 고정되고, 정화되고, 영속되고, 부재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프랑스 제국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실, 즉 프랑스의 한 젊은이로서 경례하는 이 용감한 윽인이라는 하나의 사실, 즉 프랑스의 한 젊은이로서 경예하는 이 용감한 윽인이라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러한 신화적 파롤을 구성하는 모호성은 의미작용에 있어 두 가지 결과를 가지게 된다. 즉, 이 모호성은 통고인 동시에 하나의 확실한 사실로 나타나게 된다.

 신화는 강제적이고 불러세우는 듯한 특징을 가진다. 역사적 개념에서 나오고,우연성에서 직접 생긴 신화(라틴어 학급, 위험에 빠진 제국)가 찾으러 오는 것은 바로 나이다. 신화는 내게로 향하고, 나는 의도적인 신화의 힘을 받고, 신화는 나에게 신화의 팽창하는 모호성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을 산책할 경우, 물론 나는 주택들 사이에서 건축의 통일성을, 공통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바스크 주택을 어떤 특정 민족의 산물로 인식하게 한다. 어쨌든 나는 개인적으로 이 통일 된 스타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스타일에 의해, 말하자면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스타일이 나보다 먼저, 나 없이도 이미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는 매우 광범위한 역사의 차원에서 그 결정을 가지는 복잡한 산물이다. 내가 시골의 주거 양식에 대한 거대한 그림 속에 바스크 스타일을 끼워 넣으려고 생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스타일은 나를 불러세우지도 않고, 나로 하여금 그 스타일을 명명하도록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내가 파리 근교의 강베타 거리나 혹은 장 조레스 거리 끝에서 붉은 기와, 갈색 판자, 비대칭의 지붕 사면, 그리고 그 정면을 넓게 책을 쳐서 막은 아담한 하얀 오두막을 발견할 경우, 나는 이 대상을 한 채의 바스크 오두막으로 명명하도록, 게다가 거기에서 바스크적 성질의 본질 자체를 보도록 강제적이고 개인적인 초대를 받은 것처럼 느낀다. 이는 이 경우 개념이 그의 점유적 속성 속에서 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개념은 나를 찾아와서 개인적 역사의 신호로서, 비밀과 암암리의 묵계로서 거기에 배열한 그 갸념에 동기를 부여한 일체의 의도를 나로 하여금 인식하게 한다. 이는 오두막의 소유자들이 나에게 보내는 진정한 호소이다. 그리고 이 호소는 더 강제적이기 위해 빈곤해지는 것에 동의했다. 즉,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 바스크 주택을 정당화시켜 주었던 이 모든 것, 즉 창고, 외부 계단, 비둘기집 들 이 모든 것이 무너졌다. 논의의 여지 없는 간단한 하나의 신호만이 있을 뿐이다. 감정에의 호소가 매우 노골적이어서, 내게는 이 오두막이 그 오두막을 만들어 낸 역사의 어떤 자취도 없이 나의 현존 속에 나타난 하나의 마술적인 대상처럼, 나를 위해 즉석에서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에게 말을 건네는 이 파롤은 동시에 이미 굳어 있는 파롤이기 때문이다. 내게 도달하는 순간 그 파롤은 정지되고,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려 보편성을 되찾는다. 이 파롤은 움츠러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자신의 무고를 주장한다. 개념의 점유는 의미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갑자기 물러서고 만다. 거기에는 용어의 물리적인 동시에 사법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체포가 있다. 즉,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경례하는 흑인으로 하여금 도구적인 기표에 불과하게 만들고, 흑인은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세운다. 그러나 동시에 흑인의 경예는 두꺼워지고 유리처럼 되고,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세우려고 하는 영원한 서언 속에서 굳어진다. 언어활동의 표면에서 무엇인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즉, 의미작용의 관용이 그곳에서 사실 뒤에 섬어서 사실에다 통고하는 외향을 전달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실은 의도를 마비시키고, 의도에다 말하자면 부동상태라는 불편함을 준다. 즉, 그 의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실은 의도를 얼어붙게 한다. 이는 신화가 도난당했다가 되돌려 받은 파롤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파롤은 더 이상 도둑맞았던 파롤이 아니다. 그것이 되돌아오면서 정확시 제자리에 놓여지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잠깐 동안의 도둑질, 이 은밀한 순간의 속임수가 곧 신화적인 파롤의 얼어붙은 모양을 구축한다. 

 이제 의미작용의 마지막 요소, 즉 의미작용의 동기화를 고찰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주지하다시피 언어에서 기호는 자의적이다. 당연히 나무라는 청각적인 이미지가 나무라는 개념을 의미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경우 기호는 동기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 자의성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한계들은 단어의 결합관계에서 생긴다. 즉, 언어는 도 다른 여러 기호들에서 유추하여 기호의 단편을 만들 수 있다(예를 들어 aime에서 유추하여 amable이 아니라 aimable이라 말한다). 신화의 의미작용은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동기가 부여되어 있고, 숙명적으로 유추의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라틴어의 예가 되는 성격이 사자의 명명을 만나기 위해서는 속사의 일치라는 유추가 필요하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경례하는 흑인을 포착하려면 흑인의 경례와 프랑스 군인의 경례 사이에 동일성이 필요하다. 동기화는 신화의 이중성에 필수적인 것으로, 신화는 의미와 형식의 유추 위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동기화된 형식이 없는 신화는 없다. 신화의 동기화의 힘을 파악하려면 극단적인 경우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질서한 한더미의 대상들을 앞에 가지고 있다고 하자. 이 경우 미리 주어진 의미가 없는 형식은 그 유추를 어디에도 정착시킬 수 없고, 신화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늘 제공할 수 있는 읽을거리는 바로 무질서 그 자체이다. 즉, 형식은 부조리에 하나의 의미작용을 주어 부조리를 하나의 신화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식이 초현실주의를 신화화할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즉, 동기화가 없다 해도 신화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부재 자체가 충분히 객관화되어 읽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동기화의 부재는 두번째 동기화가 되어 신화가 재구축될 것이다. 

 동기화는 숙명적이다. 그래도 역시 동기화는 매우 단편적이다. 우선 동기화는 <자연적>이지 않다. 즉, 형식에 그 유추를 제공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 다음으로 의미와 개념의 사이의 유추는 결국 부분적일 뿐이다. 형식이 많은 유사물들을 버리고 단지 그 중 몇몇 개만을 취한다. 형식은 바스크 오두막의 경사진 지붕, 눈에 띄는 들보들만을 유지하고 계단, 창고, 녹청 등을 포기한다. 좀더 나아가야 한다. 총체적 이미지는 신화를 베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신화로 하여금 이미지 속에서 그 총체성만을 파악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가득 채워진 것>과 <완성된 것>의 신화 위에서 전부 구축된 질 낮은 회화의 경우이다(이것은 부조리 신화와 반대되지만 대칭적인 경우이다. 즉, 부조리 신화의 경우에 형식은 <부재>를 신화화하지만, 질 낮은 회화에서는 지나치게 가득 차 있는 것을 신화화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화는 의미가 이미 제거되어 의미작용에 준비가 된 캐리커처, 모방화, 상징 등 빈약하고 불완전한 이미지들의 도움으로 작업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동기화는 여러 다른 가능한 동기화들 중에서 선택된다. 나는 흑인의 거수경계와는 다른 많은 기표들을 프랑스 제국주의적 성격에다 제공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프랑스 장교가 불구인 세네갈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수녀가 병들어 누운 북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물약을 내밀고, 백인 교사가 주목하는 흑인 어린이들을 가르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언론은 날마다 신화적인 기표의 저장고가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줄 책임을 맡고 있다. 

 다음과 같은 비교가 신화의 의미작용을 잘 설명해 줄 것이다. 신화의 의미작용은 표의문자만큼이나 자의적이다. 신화는 하나의 순수한 표의 체계로, 거기에서 형식들은 그 형식들이 표현하는 개념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표상하는 총체를 가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표의문자가 점점 더 동기가 없어지면서 조금씩 개념을 떠나 소리와 결합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작용의 자의성에서 어떤 신화의 마모를 알아볼 수 있다. 즉, 의사의 주름 칼러 속에서 보여지는 몰리에르의 모든 작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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