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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이야기/기억하고싶은 글

2015.12 [인용] 자유를 위한 변명




머리말 7

정글 속에서 - 지금의 삶에 대하여 11

가슴에는 남기지 않는다 - 표현에 대하여 31

구도의 춤꾼이 되어 - 나의 춤에 대하여 57

언제나 혼자지만 - 고독에 대하여 87

해골을 껴안고 - 죽음에 대하여 113

몸이 곧 법당 - 몸에 대하여 137

굴레를 벗고 굴레 속으로 - 가족과 결혼에 대하여 169

절정의 순간 - 임신과 출산에 대하여 205

자연스러울 수만 있다면 - 성과 사랑에 대하여 235

벗고 살 수 없다면 - 살림, 꾸밈, 먹거리에 대하여 257

마지막 스승은 자연 - 스승과 종교에 대하여 277






머리말 7




정글 속에서 - 지금의 삶에 대하여 11




가슴에는 남기지 않는다 - 표현에 대하여 31




●구도의 춤꾼이 되어 - 나의 춤에 대하여 57

page 67

평단의 반응은 분명하게 찬반으로 대립됐다. 내 춤을, 춤도 아니다, 그게 무슨 춤이냐면서 분노하던 사람들은 대개 무용가들이었고, 자신을 춤의 대가로 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 춤이 춤에 대한 모독으로까지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춤>지의 조동화 선생 같은 분은 '홍신자는 큰 배다. 이제 그 배가 우리에게 왔다.' 하면서, 굉장한 평을 해 주셨고, 동아일보는 '전위무용과 전통음악의 재회에 성공' 이라는 큰 타이틀로 공연 내용을 기사화했다. 박용구 선생은 '1940년 이후에 처음 보는 감동적인 독무였다.' 고 크게 호평해 주었다. 1940년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 최승희의 무용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page 74

나는 사실, 위대한 스승을 만났으니 인생의 커다란 문제들, 그리고 구도의 길에 관한 엄청난 질문들을 해서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에게 감돌고 있는 위엄과 성스러움, 지혜의 커다란 힘 앞에서 그만 기가 꺾여 모든 것을 까맣게, 아득히 잊어 버렸고, 겨우 떠올린 질문이 그것이었다.

"음, 그래? 무용가라고?"

그는 잠시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의 광채를 뿜는 듯한 큰 눈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움직임이라도 좋으니 한번 해 보라."

얼떨떨한 느낌과 함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언어보다 동작이 더 자유스러운 나에겐 어쩌면 다행스런 요구였다. 생각같은 것은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무심히 손으로부터 팔, 어깨, 가슴, 드디어 온몸을 앉은 채로 천천히 움직여 보였다.

라즈니쉬는 큰 숨을 쉬었다.

"됐다. 너는 무용을 그만두어선 안된다. 나는 네 팔과 다리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네 동작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네가 얼마나 춤 속에서 스스로 사라져 버릴 수 있는가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너는 타고난 무용가다. 결코 무용을 중단해선 안 된다. 계속하라. 너에겐 춤이 곧 구도의 길이 될 것이다. 너는 그 길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가야 한다."


춤을 추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춤은 보이지만 춤추는 자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자의 영혼에만 와 닿을 뿐 그 흔적은 남지 않는다. 그 춤이 나의 것이라고 자아를 내세울 수는 없다. 자아를 내세운다면 그 전에 춤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page 75

나는 나의 전부를,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바치는 듯한 춤을 추었다. 끊임없이 관객을 의식하면서 춤을 추어 온 나였건만, 그때 내 의식 속엔 관객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없었다.


page 76

"... 그대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하라, 사랑의 회오리바람을. 삶의 에너지가 그대를 사로잡는 대로 따라가거라.

 노래 부르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노래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펄펄 끓는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노래로 흘러나오게 하라. 춤추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춤춰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이 야생의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춤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종교의 길이요,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충만이며 영원의 세계에 사는 것이다.

 바티야(Vartya 회오리바람), 삶의, 이 야생의 에너지가 어디로 그대 자신을 이끌고 갈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대의 동작은 이제 순수한 움직임으로 바뀐다. 여긴 어떤 목적도 없다. 오직 순수한 법열과 에너지의 충만이 있을 뿐이다..."  


page 77

차츰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춤을 보았고, 많은 춤을 직접 추었었다. 그 중에는 감동이 진하게 전달되는 작품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작품, 심지어는 불쾌감마저 느껴야 하는 작품도 있었다. 이들을 갈라 놓는 것은 바로 '에고'의 있고 없음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명확히 보게 된 것이다.

 춤은 무엇을 증명하거나 제시하기 위하여 추는 것이 아니다. 춤은 등의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고 팔다리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여 주겠다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춤은 보이지 않고 춤추는 자의 몸만 보인다. 보이는 것은 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보아 주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춤은 보는 이를 괴롭힐 뿐이다. 그것은 춤이 아니다. 


이제 나의 춤은 완전한 '자기 없음'이 되어야 한다. 관객을 의식해서도 안 된다. 자아를 의식해서도 안 된다. 오직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만이 몸에 실려 저 영원의 율동으로 남게 해야 한다. 그것은 곧 무아의 상태다. 무아의 상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의 상태이다. 춤은 그 자유로 가는 길을 제공해 준다. 춤추는 자와 보는 자 사이에 말없이 흐르는 저 감동은 바로 자기를 완전히 놓아 버린 자유의 희열을 교감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page 81

 나는 춤에 대한 자세를 완전히 바꾸었다. 춤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었고, 이제 회의나 갈등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드디어 춤과 자유롭게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춤추는 나의 에고가 사라져 순수한 법열의 경지에 들어서지 않으면 나의 춤을 보는 자의 에고도 사라질 수 없다. 그때 우리의 만남은 한 에고와 또 한 에고의 만남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만남이라면, 굳이 춤을 통하지 않아도 지겹도록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춤을 통해서 서로 만나고자 하는 것은, 평상시에는 이를 수 없는 저 높은 의식의 차원에서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관객을 의식하지 말아야 했고, 나를 의식하지 말아야 했고, 마침내 춤마저도 의식하지 말아야 했다. 내가 공연을 계속하는 한, 완전히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과거 나를 인도로 휘몰았던 그런 갈등이 다시 찾아오진 않았다.

 나의 작품은 어느 것이든 궁극적으로 자유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몸짓이다.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그런 몸짓이 에너지로서 가장 순수하게 표출되었던 것은 아마도 84년에 발표한 <나선형의 대각선(spirla dance)>이 아니었을까 싶다. 솔로로 공연했고, 나름대로 완성도도 높았다고 생각하는 이 작품은 한창 구도에 정진하던 어떤 수녀를 수녀원에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어둠이 지배하는 무대 위에 나는 왼팔로 해골 하나를 내 다뜻한 가슴에 소중히 끌어안고 서 있다. 그뿐이다. 언뜻 보면 그뿐이지만, 그러나 거기엔 작은 움직임이 있다. 내 몸은 바닥에 부리를 박은 듯 붙박이로 서서, 천천히, 천천히, 마치 여린 봄 바람에 꽃대가 흔들리듯이 그렇게 마냥 원을 그리며 흔들린다. 오른팔은 몸의 반대 방향으로 원형을 그리고 손끝이 예민하게 춤추고 있다. 내 몸의 움직임은 탄생과 죽음, 탄생과 죽음, 탄생과 죽음... 변함없이 끝없이 도는 생의 윤회와도 같다. 그 움직임은, 탄생과 죽임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무나 단조로운 회전의 무한 지속. 그 음직임은 너무나 단조로운 나머지 삶에 의해서도, 죽음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는 한 인간의 움직임으로 그렇게 남는 것이다.


page 86

 해변의 한쪽 끝으로 가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수십 미터의 거대한 수증기 기둥을 볼 수 있다. 땅끝이 토해 놓는 드러운 용암과 차디찬 바닷물이 만나면서 이루어진 거대한 수증기 기둥이 언제나 하늘을 지르고 있다. 그 가까이로 다가가면 쉭쉭거리는 대지의 흥분과 안개처럼 흩어지는 바다의 거친 호흡을 느끼게 된다. 다시 보름달이 솟는 밤, 그곳에 가서 밤을 보내고 싶다. 그곳에 가서 검은 모래를 밟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싶다. 나는 많은 무대에 섰었지만, 나의 마지막 무대는 결국 자연이 아니겠는가.




언제나 혼자지만 - 고독에 대하여 87

page 98

고독을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은 남을 이렇게 괴롭힌다. 내가 그녀를 도와 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병은 자신만이 치료할 수 있다. 내가 일시적으로 그녀의 위안이 되어 주고, 고독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어 줄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그녀를 완전히 혼자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그뿐이었다. 다만 그날은 이미 하루가 다 기운 터였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나의 하루를 그녀에게 나누어 주자고 너그럽게 다짐했다. 이젠 내쪽에서 그녀의 찬란한 역사를 건드려 불러내기도 하고 늘 보아 왔던 사진이지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 주기도 하면서, 모든 얘기를 즐겁게 다 들어 주었다. 그리고 밤 늦게 그녀를 웃으면서 꼭 안아주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해골을 껴안고 - 죽음에 대하여 113

page 129

 나는 드디어 에고를 죽였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에고가 죽는 과정은, 실제의 죽음에 따르는 모든 두려움과 고통이 그대로 현실로 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의 죽음과 똑같은 것이었다. 

 눈을 감는다. 명상 상태로 들어가 나 자신을 보며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하나하나 버려 나간다. 나는 부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부정해야 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조차 감추고 싶었던 치부들을 죄다 들추어 놓는다. 그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듯 내보인다. 실제로 온 우주가 내 앞에 있지 않은가.

 나는 이제 죽는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애착으로 다가오던 것들이 다시 밀려온다. 그것들을 행해 묻는다. 나는 이제 죽는다, 너희들은 의미가 있는 것이냐? 단단한 질문의 벽에 부딪혀 내 인생의 지나온 전과정이 빛을 잃고 흐물흐물 무너지는 것이 보인다. 내 인생의 업적에 담긴 지독한 무의미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진다.

 나는 이제, 그런 나 자신을 향해 돌아서서 묻는다. 그러면 저 지독한 무의미에 한없는 애착을 느끼던 너는, 너는 의미가 있는 것이냐? 너는 의미가 있는 것이냐? 나는 드디어 가느다란 한 가닥 밧줄에 매달린 곡예사와 같은 형국이 된다. 아래로는 천 길, 만 길 깊이를 알수 없는 캄캄한 나락이 있다. 한번 손을 놓으면 캄캄한 저 나락 속으로 나는 영원히, 영원히 바닥을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내릴 것이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밧줄 한 가닥뿐이다. 이 밧줄은 나의 존재를 정당화해 줄 유일한 이유, '나에겐 살아 있어야 할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얼마나 자주 이 상태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돌아나가야 했던가. 지금, 이 손을 놓지 못한다면 저 밧줄엔 다시 뼈와 살이 붙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나는 마침내 손을 놓아 버렸다. 엄청난 중력에 끌려 나는 한없이 떨어져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심장을 찢을 듯이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캄캄한 나락은 감쪽같이 걷히고 그것은 일순간에 환한 백색 공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 안정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지금 앓고 있는 네 몸의 병은 정신에 일어난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 병을 앓고 나면 이제 너의 몸이 신성해질 것이다. 가끔 우리는 심신의 독을 씻어내기 위하여 병을 필요로 한다."


page 136

 살아났다는 것에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다니. 도대체 이 기쁨과 안도감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기쁨과 안도감은 바로 죽기 싫다는 집착의 반증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죽음을 자신있게 능동적으로 맞이하려고 했었다.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하지 않았던가. 죽는 것은, 소멸하는 것은 단지 에고일 뿐이라며 초연하게, 오리혀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려 하지 않았던가. 역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죽음, 나는 그것의 초월과 포박 사이를 아직도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의 가슴을 뻐근하게 채우며 다가왔던 그 우주의 섭리를 다시 느끼고 그것을 놓치지 않도록 명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명상을 한다. 갈마들며 내 죽음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종이 되기도 하는 나의 의식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 그리고 항상 큰 섭리 속에서 뚜렷이 깨어 있기 위해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나는 말한다. 마치 용변을 보듯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고.




몸이 곧 법당 - 몸에 대하여 137

page 148

 나는 내 몸을 얼마나 알고 있었던가. 무용을 위해 몸을 열심히 단련하긴 했어도, 나는 내 몸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했다. 내 몸에 필요한, 또 불필요한 중요한 음식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내 몸의 오장육부가 어떤 색깔, 어떤 형태로 어느 위치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몰랐다.

 나는 내 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나는 나요, 하나는 내 몸이다. 나는 내 몸에게 계속 물었다. 나의 잘못이 무엇이었고,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를. 내 몸은 대답한다.

 "너는 네가 구하는 바를 위하여 나를 혹사하기만 했다. 너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너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얼마나 피로한지를 알지 못했다. 너는 에고의 부질없는 욕심에 쫓겨 의미없이 나를 학대했다. 나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마침내 너의 긴장이 느슨해졌을 때 나는 본때를 보일 기회를 잡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의 노예처럼 취급당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나는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내 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이 고통의 원인을 역사처럼 담고 있다가 나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참회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중도를 잃었었다. 나는 자연과의 함치를 잃었었다. 앞으로 나는 언제까지나 이 몸의 소리에 귀기울이리라. 나는 누운 채로 몸의 근육 하나하나를 조용히 움직였다. 그것은 몸의 소리에 동의하는 조용한 춤이 되었다. 눈물이 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page 157  

 나는 건강을 회복한 이후, 나의 몸에 대하여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애정을 보내자고 다짐했다. 되찾은 건강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 것은 생활 속에서 명상을 계속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실 건강 유지란 별 게 아니다. 항상 몸을 인식하고 습관을 잘 들이면 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기 몸에 대한 관찰과 연구다. 자기 몸을 일주일만 연구하고 나면, 간단한 산수보다고 더 쉽게 모든 것을 풀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모든 병은 결국 신경의 과로에서 오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을 부리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하다 보면 조화가 깨지는 법이다. 조화가 깨어진 상태, 그것이 바로 병이다. 

 이제 명상은 어느 때보다도 내 가까이 있었다. 명상의 구체적인 방법들은, 책에서 배우기도 했고 전문가에게서 전수받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의 몸이라는 체험의 덩어리에서 직접 읽어 냈다. 근본적인 명상의 원리에 통하기만 하면 무엇을 통해서든 명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방법은 너무나 많았다. 나는 체험의 세밀한 부분들을 잘 살펴 많은 방법들을 직접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는 언제, 어디서든 명상을 했다.


page 165

 몸이란 무엇인가?

 어느 때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멀리 날아가고 싶은 것을 꽉 붙잡는 구속이라고 느껴진다. 어느 때는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고, 그것만이 진정한 나의 재산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몸은 양면성을 지녔다.

 몸은 물질이다. 물질이기에, 그것이 보전되기 위해선 다른 물질들을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하여 모든 욕망, 모든 세속적인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존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몸은 어서 벗어던져 버려야 할 것으로만 느껴진다. 그러나 몸은 소중한 것이다. 몸은 인생이라는 체험을 살게 해 주기 때문이다. 몸이 생긴다. 그것은 탄생이다. 몸이 없어진다. 그것은 죽음이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든 체험이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생은 체험이다. 인생이란 무슨 최종적인 성과를 얻고, 무슨 최종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체험, 체험하는 '과정'이다. 우리 인생에 단 하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을 과정으로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몸이 없이는 그 체험의 현장을 찾아다닐 수 없다. 그러기에 몸은 소중한 것이다.

 몸은 몰질이지만, 또한 가장 영적인 물질이다. 바로 영을 보전하는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장소는 죽는 그날까지 신성하게 보전해야 한다. 몸은 내 삶의 화두가 된다. 필요 이상의 욕망으로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있지 않은지 늘 살피도록, 몸은 나에게 계기를 마련해 준다. 몸은, 어디까지가 나에게 허용되는 최소한의 욕망인지를 알려 주는 척도가 된다. 이 몸을 건강하게, 정결하게, 신성하게 보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지나친 욕망이요 세속적인 욕망이다. 이 몸은 나의 법당인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경건해진다.

 나는 멍청한 듯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문득 오해하고 남들은 나에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돌히 하고 있느냐 한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앉을 채로 몸의 에너지가 흐르는,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 감각과 은밀히 만나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 어느 것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시간은 흐르나 나는 그 시간을 잊었다. 사람이 곁에 있으나 나는 그 사람을 잊었다. 나는 나의 몸에 커다란 감사를 느끼며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조용히 나를 내 몸에 맡겨 본다.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나의 중심에서 열이 생긴다.

나의 맥박은 조용히 뛰고,

공기는 나를 숨쉬게 하고 있다.

나의 손발이 따뜻함을 느낀다.

나의 모두를 내 몸에 맡겨 버린다.

맥박은 조용하고 숨결은 유난하다.

나도 사라지고 내 몸도 사라진다.




굴레를 벗고 굴레 속으로 - 가족과 결혼에 대하여 169

page 183

 인도를 다녀온 뒤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결혼해도 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인도가 나에게 결혼을 하라고 말해 준 것은 이니다. 나는 다만 인생이란 어차피 환영이란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고, 꽃은 피고 지고, 세상은 변하지만,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그 변화하는 다양한 양상들에 아무 뜻이 없다. 하나의 세계를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인생은 환영이란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것이다.

 "잠을 자고 있을 때, 그 순간에 그대는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수행 시절의 스승 니사가다타는 그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의 느낌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이따금 꿈이 피오올라, 스스로 행복하다고, 또는 불행하다고 느끼겠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뿐이다. 너는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꿈 속에서 꿈을 진행하듯 너는 그렇게 살면 된다. 인생은 환영이기 때문이다."

 

page 184

 인생은 환영이다. 이것은 허무주의적인 입장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지만,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이다. 자연스런 흐름에 반대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어떤 일에도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절정의 순간 - 임신과 출산에 대하여 205




자연스러울 수만 있다면 - 성과 사랑에 대하여 235

page 253

 사랑이 있는 자에게는 호랑이도 덤벼들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맹수가 우글거리는 삼림 속에서 일생을 살면서도 맹수에 당하지 않는 자가 많다. 그들이 무슨 도술을 행하거나 해서가 아니다. 동물의 감각은 인간보다 예민하다. 동물들은 자신에게 향해지는 적의를 감각으로 알아차린다. 단지 그 감각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거리의 적을 추적한다. 그 감각으로 그들은 사랑과 자비심으로 충만한 자를 알아보는 것이다. 동물들은 자신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이 아니면 공격하지 않는다. 


page 254

 사랑의 위대함은 식물의 실험으로도 증명된다. 두 개의 같은 식물을 같은 조건으로 나란히 놓고 기를 때, 한 식물에게만 사랑의 말을 해 주고 만져 주면 그렇게 하지 않은 쪽보다 휠씬 성장이 좋다고 한다.


page 255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사랑을 찾자. 그리고 그 사랑을 베푸는 공부를 하자. 사랑은 베푼다는 것은 권력이나 돈을 베푸는 것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라고 성현들은 가르쳤다. 그러나 베푼 사랑이 되올아 오지 않을 때의 실망을 염려하여 차라리 사랑을 안 하겠다고 철문으로 자기 가슴을 무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사랑을 안고 접근해 오면 두려움과 긴장을 먼저 느낀다. 그들은 그것의 승부가 어찌 될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다. 가슴에서 시작된 사랑이 머리로 옮겨지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계산과 방어만이 남고 만다. 가슴을 헤치고 조용히 엿들어 보라. 사랑의 힘이 용솟음치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의 힘이 온몸으로 퍼져 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비의 전율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철저히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했을 때 격려해 주고 축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이름 아래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선생은 제자를 구속할 때가 많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며 기대일 뿐이다. 질투, 소유욕을 우리는 빈번히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미리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구속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로써 조건을 붙인다. 때문에 그 사랑이라는 것은 조건에 어긋나면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마저도 그런 예가 없지 않다. 자기들의 사랑에 의하여 태어난 자식에게까지 조건을 붙인다.




벗고 살 수 없다면 - 살림, 꾸밈, 먹거리에 대하여 257

page 265

 나의 살아가는 태도를 항상 염려해 주던 한 선배는 왜 99명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 다른 길을 가느라고 그렇게 고생하느냐고 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차리고 다니면 서로 편할 것인데 괜한 빈축을 사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모방한다고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연히 나를 괴롭히며 남들을 따라가고 싶진 않다. 

 역사에 빛을 남긴 성자나 철학자들은 돌에 맞고 십자가에 박히면서까지 그들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었다. 나는 그들과 비교할 바도 아니지만, 나에게 가해지는 박해라 해야 고작 따가운 눈총일 뿐이지 않은가. 굳이 굽힐 이유가 없다. 남의 눈충이 무서워 타협하는 자는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될 것이다. 결국 허무를 느낄 것이다.

 모두가 하는 대로 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은 고정관념일 뿐이다. 소위 이 땅에서 정상이라는 것도 시대와 공간을 벗어나면 더 이상 정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한 향상과 발전을 향한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능하고, 하나도 있고 둘 이상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이미 깜깜한 험로를 벗어나 빛이 있는 대로에 들어선 수행자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한 엄청난 환상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깨달음이란 것도 단지 고정관념이 깨어진 상태일 뿐이다. 물론 그 상태로 가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벗어나는 길이니까.


page 269

 나는 또 다시 인간들로 이루어진 숲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런데 어떤 나무는 빨간 블라우스를 감고 있고, 어떤 나무는 보랏빛 셔츠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우스꽝스러웠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보다 영적으로 진화하고 나면 결국은 옷을 벗게 될 것이다. 거꾸로 옷을 벗음으로 해서 영적으로 진화한 상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옷을 입지 않은 인간은 허세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옷을 입지 않은 인간은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옷을 입지 않은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벗고 사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입지 않은 듯 최소한으로 입고 살아야겠다는 것도 그때 품은 생각이다.




마지막 스승은 자연 - 스승과 종교에 대하여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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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배꼽을 놓고 허탈한 웃음을 계속 짓는 나를 향하여 그(라즈니쉬)는 말했다. 

 "너는 이제 떠나기 바란다. 거리의 춤추는 거지가 되든, 이름없는 동네의 아낙이 되든, 무엇을 택해도 좋다. 너는 이미 삶은 환영일 뿐이라는 진리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가라. 가서, 갠지스 강가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든, 도시의 인기 높은 광대가 되든, 결국은 별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네가 원하는 바에 따르라. 아무 두려움을 가질 것 없다."

 그날 나는 그의 산보 시간을 기다렸다. 그는 하루에 꼭 4마일씩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걷다가 라시를 한 잔 사 드리고 싶다고 청해, 가까운 찻가게도 갔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묵묵히 차를 나누었고, 차를 다 마셨을 때 우리는 일어섰다. 헤어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렇게 담담했다.


원래부터 나에겐 종교가 없없다. 한때는 종교에 관심을 두고 경전을 탐독하는 종교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교회와 절을 열심히 기웃거렸지만, 역시 종교를 가졌다고 할 만한 때는 없었다. 종교 근처를 배회하며 내가 느낀 것은, 종교는 인간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경전과 사원에 소속해서 개성없는 존재로 변해야 하는 것이 종교라고 할까, 그것에 묶여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또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경전 속에도 경전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 나오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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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라지를 찾아갔을 무렵 나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장 절실했었다. 그는 말했다.

 "바로 이 순간, 너는 신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은 단지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그것만이 확인된 사실이다. 너는 신에 대해서 배웠을 뿐이지 그를 보지는 못했다."

 나는 말했다.

 "저는 신을 본 것 같은데요."

 "너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너의 존재만이 오직 분명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것만이 네가 아는 사실이다. 너는 신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 네가 본것은 바로 그 느낌의 반영일 뿐이다. 너에게 '나는 이렇게 있다(I am)'라고 하는 존재의식이 없다면 다른 아무 것도 거기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존재의식에 달려 있다. 이 세계는 네 존재 의식의 긴장 상태일 뿐이다. 네가 의식하지 못하면 너는 기억할 수 없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면 너는 세계를 알 수 없다. 신이란 마음 속의 관념이다."

 "그렇다면 신이란 없다는 말씀입니까?"

 "흔히 말하는 그런 신은 없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의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우주를 감싼 진정한 실체는 오직 하나이다. 사람마다 신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실체가 갖가지 일 수는 없다. 삼라 만상은 변화한다. 그 모든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되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본질이 있다. 표현하자면 그것을 신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것에는 형상이 없다. 그 순수한 실체는 묘사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부정을 통해서 그것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나면 그것만이 남을 것이다."

 신을 사이에 둔 나와 마하라지의 문답은 날이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하루의 문답을 마치면, 나는 홀로 하염없이 바닷가를 걷거나 강가에 앉아 신을 응시하는 마음으로 멀리 저녁 노을을 늦도록 바라보곤 했다. 어느덧 붐베이에 어둠이 내리면 나는 나의 숙소 -역시 다락방이었다- 로 돌아와 열기로 가득찬 좁은 공간에 지친 몸을 눕혔다. 그리고 다시 날이 밝으면 신을 찾기 위해 마하라지를 방문했던 것이다. 

 "호흡을 지켜봄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정화된다. 우리가 호흡을 통하여 얻으려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자각(atma-siddhi)이다. 옴(Aum)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호흡인 것이다. 나를 의식한다는 것과 호흡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숨쉬지 않는다면 스스로에 대한 의식도 없다. '나는 이렇게 있다'는 의식('I AM' consciousness)은 호흡을 아는 데서 비록된다. 모든 지식은 결국 신을 알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신'이란 '나는 이렇게 있다'라는 의식의 속칭일 뿐이다. 그러므로 네가 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의식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곧 이사와라(isawara), '나는 이렇게 있다'는 의식이다.

 신은 언어 너머에 있었다.

 "결국 너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 너에겐 이사와라의 체험이 필요하다."

 마하라지는 언어로만 모든 것을 추구하면 결국 언어의 유희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와의 맹렬했던 문답은 대부분 이제 기억에서 희미하지만 그 무렵의 체험 하나만은 너무도 생생하다. 나는 지금 '체험'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어느 날 밤의 꿈이었다. 


page 287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막막하고 지루한 느낌이 자꾸만 밀려왔다. 이 존재계 전체에서의 내 위치가 미미하고도 하잘것없다는 인식이 순간적으로 찾아왔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흐리멍텅해져 버린 것이다. 특히 알 수 없는 것은 내 존재의 의미였다. 나는 그 동안 수행을 통해서 진정한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었다. 나에겐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모든 것을 분간할 수 없는 혼돈 상태로 들어선 것이다. 

 나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마하라지였다. 나는 그에게 나의 꿈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에게뿐만이 아니라 나는 이 꿈 이야기를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질문과 대답 속에서 그것을 알았다. 

 "마하라지, 당신은 신에 대한 의식을 얻기 위해선 자신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나는 이렇게 있다'는 의식이 찾아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뒤로 나 자신을 더욱 모르게 되었습니다."

 "바스(bas)!"

 "바스?"

 "이제 됐다는 것이다. 처음에 잔물결은 스스로 잔물결인 줄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큰바다 위의 잔물결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잔물결은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오직 큰바다와 하나로 출렁일 뿐이다."

 큰바다와 하나로 출렁일 뿐이다...

 "그런데 이 막막함과 지루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느끼는 것이 누구인가?"

 "제가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너는 비옥한 대지와 같은 것이다. 많은 것들이 네 위에서 자라고 네 속에서 나온다. 어네게서 자라나온 것들에 대해 너는 더 이상 책임이 없다. 네 위의 초목이 죽어 사라진다 해도 너는 이 대지처럼 남아 있다."

 "이 막막함과 지루함을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그대로 두라는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라. 체험하는 자는 거기에 남을 것이지만 체험은 왔다가 사라질 것이다. 너는 모든 감각적 체험을 넘어선 그것의 목격자이다."

 체험은 왔다가 사라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앞의 안개가 걷혀나갔다. 그때의 내 심경을 굳이 표현한다면 '무한히 겸허해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머리는, 시일이 흐르면서 가슴이 받아들인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하게는 되었다. 어느 날에 이르러 나에게서 허탈한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마하라지는 그 웃음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나는 언어 너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네가 나에게 와서 새롭게 배운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구겨진 관념들을 펴 줄 뿐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신의 관념을 다리미로 사용했다. 너는 세상으로 나가야겠지만, 거기에선 아무에게도 신은 다리미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page 298

 나는 이제 곧 여기 볼캐노 정글을 떠나 도시로 가지만, 가더라도 잠시일 뿐이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이곳이 아닐지라도 결국은 나의 고향, 자연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날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의 티없는 눈동자,

한밤중 잠 못 이루게 하는 바람소리,

나뭇잎을 두드리고 흩어지는 작은 빗방울,

어느덧 솟아난 무지개,

저녁 노을에 비친 구름떼,

잔디에 고스란히 앉아 있는 아침 이슬,

임자 없이 자란 들판의 갈꽃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직전의 이 적막과 

물처럼 흐르는 어둠과 빛.